[사무직 의전 문화 그리고 직장동료의 장례식]
주말이었다. 검은 정장과 편한 신발을 골라 집을 나섰다.
우리회사 가장 높으신 분의 가족분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영업기획팀에선 3일동안 지원갈 인원수를 적은 시간표를 만들고, 팀장들은 긴급 연락망으로 톡을 돌렸다. 취합의 중점은 지원 가능한 인원 수가 아니다, 무조건 가는 전제로 오전, 오후, 야간 중에 어느 타임에서 일할 것인지를 적어서 내면 된다. 시간대별 지원자 명단이 완성되자, 임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누구나 주말에는 회사 일을 하기 싫다. 이건 회사 일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는 봉사활동 같은 것이다. 존경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 그게 보고의 중점이다. 실제로 그분이 시킨 것도 아니다. 장례를 치르시는 동안 그분이 불편하시지 않도록 우리는 자발적으로 조를 짜서 동원되었다.
우리 팀에 할당된 시간은 어느정도 정해져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않으면 우리 팀에 누군가가 더 오래 그곳에 머물러야한다. 팀원들 사이에 미묘하게 기분 상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는 최대한 빠지지 않는 게 좋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다른 팀 직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음식을 나르고 신발을 정리하고 조화가 가야할 곳을 안내했다. 특히 협력사의 높은 분들도 많이 오시기 때문에 MD들은 홀을 주로 맡는다.
사회적인 명망이 있는 분이다보니 조문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온다. 조화는 더이상 놓을 장소가 없어서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는 기다란 흰 띠만 떼서 장례식장 벽면에 붙인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기업의 대표와 국회의원과 장관, 시청, 구청 등등 장이란 모든 장의 이름은 다 본것 같다. 다닥다닥 최대한 좁게 붙였는데도 금방 벽면이 가득 찼다.
우리 할머니 장례식이 떠올랐다. 식구들 몇몇이 텅빈 자리를 채워서 앉아있어야 했다. 나의 사회적 위치가 높지 않아서 내 가족의 장례식이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선배는 신발정리를 했다. 조문객이 뜸할 때 선배는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우르르 몰려오는 손님들이 벗어두고 간 신발을 어느정도는 그룹에 맞게 모아놓고 돌려놓으면 된다. 신발이 가득 차있는데도 선배는 귀신같이 찾아서 바로 신으실 수 있도록 제공했다.
그 선배는 본사에서 사원때부터 일을 해서 그런지 이런 의전활동에 익숙했다. 이것 뿐만 아니라 상사를 대면하는 거의 모든 일에 능했다. 이렇게 압도되는 장례식에 처음 오게되어 놀란 나에 비해 그는 더 회사원 같았다. 그 선배처럼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 깊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난 음식을 날랐다. 밀려드는 조문객에 거의 무념무상으로 일했다. 그렇게 우리가 해야할 시간이 끝나가자 장례식장 육개장 한 그릇씩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원들과 팀장들은 3일밤을 샐 각오로 남아있었다. 실제로 3일 내내 출근도 제쳐두고 그 곳에 붙어있던 팀장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필해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일을 좀 그렇게 하지.
자리를 떠나면서 슬쩍 보니 높으신 분의 가족들은 다른 메뉴를 드시고 계셨다. 한 눈에 보기에도 하나 하나 고급스럽게 포장된 음식들이었다. 나보다 족히 10살은 어려보이는 그분의 아들 딸도 보았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 20대 초반인 그는 이렇게 충성을 다바쳐 무보수로 일하고 있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린 살기 위해,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대리시절에 나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가 같은 해 돌아가셨다. 회사에서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연차와 조화 정도는 지원을 해준다. 그러나 당시엔 장례 비품 지원은 없어서 우리 회사 마크를 단 비품들을 깔아두진 못했다. 최근에야 한 부장님이 우리 회사에도 장례비품 정도는 있어야하지 않느냐 건의를 해서 비품 지원이 신설되었다. 업력이 30년이 다 되가는데 직원들 장례비품 챙겨준지는 5년이 채 되지 않는다.
외할머니의 장례는 아예 지원대상으로조차 치지 않는다. 개인 연차를 써야하고 그나마도 보내주던 조화도 신청할 수 없다. 친할머니는 조부모 장례 지원대상이고 외할머니는 아니다는 어느 나라의 법인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제법 큰 회사도 이런 복지 정책을 가지고 있는 회사가 아직도 많다.
직장에서 가는 장례식장은 처음보는 이의 장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처음 마주한 분께 두 번 절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목례를 건넨다. 바쁜 와중에 와준 우리를 고마워하는 그분의 자제를 위해 우리는 장례식장을 간다.
난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던 여자 동기와 조문을 계기로 친해진 적이 있다. 그녀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갔었다. 아마 안 와도 몰랐을 그런 정도의 사이였다.
힘들었겠다.
회사에서 누구보다 씩씩하던 애가 눈물을 글썽였다. 회사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우리도 누군가의 가족이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운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는 게, 직장에서 마주하는 장례식장의 풍경이다.
그 친구 역시 나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왔다. 그렇게 오고가는 형식적인 예절의 절차가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간에 쌓인 작은 오해를 풀고 지금은 누구보다 친한 동기가 되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장례식, 그러나 너무 중요한 장례식. 나의 외할머니가 떠나가실 때 조화 하나를 보내주는 것도 아까워했던 회사의 가족분의 장례식이었다. 그분의 자제이자 우리회사의 높으신 분과는 사실 몇 년에 걸친 근무기간 동안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눠본 적이 없다. 가끔 무슨 생각으로 회사를 운영하시느냐 묻고 싶은데, 마주친 적도 별로 없다. 그러나 난 그곳에서 내 가족의 장례식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집에 돌아와 까맣게 때가 탄 발목 스타킹을 보며 생각했다.
난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할머니 두분 다 잘 계시겠지?
미안해요. 손녀가 먹고사느라 그랬어.
[회사생활 꿀팁]
-. 남들도 하기 싫은 일에 자꾸 빠지는 사람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 팀원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가도 이런 일만 골라서 빠지면 나중에는 정말 싫어진다.
-. 내가 하기 싫은 건 남들도 하기 싫다. 한번은 명절 연휴에 고객이 많아서 바쁜 점포의 POS지원을 각 팀별로 한 명씩 꼭 가야한다고 했다. 그 때 마침 내가 자리에 있어서, 모두에게 이야기를 전달해달라고 하셨다. 난 내 이름을 써서 냈다. 지원가는 명절 당일, 나가기 너무 귀찮아서 몸부림쳤지만 지금도 그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 한번 양보하면 다른 사람도 그 마음을 어렴풋하게라도 알게 된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서로 하기 싫은걸 먼저하는 분위기가 낫다. 분위기란건 충분히 내가 만들 수도 있다.
-. 막내라고 선임이라고 늘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당사자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연차를 떠나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자.
MD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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